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버트 무가베 (문단 편집) == 집권 전 == [[파일:robertmugabe.jpg|width=450px]] [[1980년대]] 무가베의 모습. 지금은 김정일도 능가한다는 평가까지 받을 정도로 극악무도한 독재자로 추락했지만, 젊었을 적의 무가베는 짐바브웨의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으며, [[로디지아]] 시절 실질적으로 독립운동을 지휘하여 백인정권을 패퇴시키고 백인정권에 신음하던 흑인들을 해방시킨 인물로, 사실상 '''짐바브웨의 [[국부]]이자 흑인 독립운동의 대명사격 인물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다.''' 독립영웅이 독재자가 된 경우는 많아도, 흑화의 정도로 따지면 무가베 이상인 경우는 [[에리트레아]]의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외에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무가베는 [[코사족]] 추장의 아들로 태어난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나 자나키 족 추장의 아들로 태어난 [[탄자니아]]의 [[줄리어스 니에레레]] 전 대통령, 키쿠유족 출신의 주술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케냐]]의 [[조모 케냐타]] 전 대통령 등 다른 아프리카 국가의 역대 지도자들과 다르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로,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빈곤한 목수였다고 한다. 부모는 [[프랑스]]에서 온 [[예수회]] [[사제(성직자)|사제]]들의 영향을 받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무가베도 선교사들이 개척한 마을에서 자라났다. 하지만 아버지는 예수회 선교사들과 사이가 벌어졌고, 선교마을에서 쫓겨나서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이렇게 방랑생활을 하면서 무가베의 형제 자매도 전염병으로 요절했지만, 다시 마을에 돌아와서 선교사들에게 교육을 받았다. 부모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수업료를 계속 내어줬고, 그는 고향의 쿠타마 대학에서 교사자격 과정을 마치게 되었다. 그는 쿠타마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일하던 중, 1949년 장학금을 받고 당시 아프리카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근대화되어 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포트할레 종합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할 기회를 갖게 된다. 똑똑하고 부지런했던 무가베는 남아공으로 유학을 와서 이곳에서 교육학을 전공했고, [[아프리카 민족회의]](ANC)에 가입하면서 반식민주의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는 1952년 고향으로 돌아와 찰림바나 사범대학(Chalimbana Teacher Training College)에서 교수로 일하면서 교사들을 양성했다. 하지만 백인정권 아래서 아프리카인들이 신음하는 것을 인식한 그는 점점 과격해지게 되었고,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는다. 이렇게 점점 과격해지던 무가베는 195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인 투쟁에 나선다. 38세인 1960년부터 로디지아 백인정권에 맞서 짐바브웨의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으며 1964년 과격한 행동으로 인하여 [[넬슨 만델라]]처럼 10년 동안 감옥에 투옥되어 1974년에 풀려났다. 옥고를 치르는 중 아들을 병으로 잃기도 했으며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연합의 최고 지도자가 된 무가베는 평화적인 투쟁만으로는 독립을 얻을 수 없음을 느끼고 무장투쟁으로 전환했다. 감방에서 무가베는 이전부터 다니던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공부를 멈추지 않아 경제학 석사, 행정 학사 및 2개의 법학 학위를 따게 되었다. 무가베 자신은 감옥에서 풀려난 후 당시 공산정권이 들어서 있던 인접국 [[모잠비크]]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짐바브웨의 게릴라 전쟁을 지휘한다. 이 당시 여러 공산국가들은 아프리카 해방운동을 지원했고, 소련, 중국, 동유럽 각국, 북한까지도 무가베의 게릴라전을 지원했다. 물론 무가베는 군사지도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개별작전을 지휘하지는 않았다.[* 짐바브웨의 군부 실세들이 대부분 이 당시 무가베의 호소에 응해 게릴라전에 참전한 인물들이다. 쿠데타군을 이끈 필립 콘스탄티노 치웽가 대장도 이때 게릴라전에 참전한 인물. 부부 세습을 하려는 무가베에 대해 쿠데타를 일으켜 하야를 압박했어도 상당히 예우를 갖춘 것은 다 이런 인연 때문이다.] 수많은 흑인들이 무가베의 호소에 응해 게릴라전에 참전하였고, 백인 정권과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 이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수 만명의 사상자를 난 참혹한 전쟁이었다. 백인정권은 무력에서 압도적으로 앞섰지만 머릿수가 딸렸기 때문에 도저히 이런 손실을 감당할 수 없어서 손을 들고 말았다. 당시 무장 투쟁의 실질적인 중심은 무가베가 아닌 [[카난 바나나]]였는데, 쉽게 말해 [[쿠바 혁명]]으로 치면 무가베는 [[체 게바라]]의 포지션이었고 바나나는 [[피델 카스트로]]의 포지션이었다고 보면 된다. 다만 무가베는 반 로디지아 정부 투쟁 당시 동맹 관계였던 ZAPU(짐바브웨 아프리카 인민 연맹)와 연대할 때도,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에서는 배신을 일삼았다고 한다. 결국 1979년 백인정권은 손을 들고 말았고, 1979년 영국에서 랭커스터 하우스 합의가 발표되어 백인 정권은 항복하고 흑인에게 정권을 넘기겠다고 합의했다. 이후 백인 정권인 로디지아가 흑인에게 정권을 넘기면서 국호를 바꾼 짐바브웨가 정식으로 독립했다. 그리고 카난 바나나가 대통령이 되고 그가 초대 총리를 맡아 실권을 가졌으며, 1987년에 로디지아 정부-ZANU-ZAPU 3자가 합의한 랭카스터 협정을 깨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바나나를 잡아다가 [[동성애]] 혐의로 투옥시켰으나 바나나는 감옥에 갇힌 지 얼마 못 가 [[탈옥]] 후 [[우간다]]로 망명했다. 말하자면 체 게바라가 [[쿠데타]]를 한 번 더 일으켜서 카스트로를 축출하고 [[쿠바]]의 대통령이 된다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대통령이 된 무가베는 총리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이 되어 30년간 짐바브웨를 통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